2010년 10월 27일 수요일

마르틴 루터 - 종교 개혁

지금부터 488년전 오늘, 그러니까 1517년10월31일 독일의 젊은 신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면서 '종교개혁'이란 세계사적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를 거쳐 나간 기독교가 새로운 변혁을 맞은 날이지요.

중세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 양심을 뒤흔들었습니다.
루터는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당시 교회의 가르침에 침묵할 수 없었지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구절은 계속하여 그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그 당시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가리라"고 테첼은 신자들을 유인했다고 합니다.
 











면죄부 판매 광경과 판매인 테첼. 그가 판매한 면죄부는 로마 성베드로 성당의 재건축과 마인츠의 대주교 알베르트의 매직(買職) 비용의 충당기금에 사용될 것이었다.

루터는 여러 차례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자 1517년 10월 31일, 드디어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걸었습니다.
루터는 이후 계속적인 투쟁을 통해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 sola gratia(오직 은혜로)라는 핵심 교리를 정립하면서 존 칼빈과 함께 오늘날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기초를 확립합니다.

Thesentür
95개조 반박문이 붙여진 비텐베르크 교회 문.

독일의 비텐베르그는 '루터의 시(市)'라는 별명을 갖고 있지요.
제가 비텐베르크를 가보니 'Lutherstadt'라는 글자가 앞에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 비텐베르크에는 온통 루터 축제입니다.
'루터의 결혼식'같은 행사 때면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가 됩니다. 

Deutschland
비텐베르크의 위치. 바흐가 활약했던 라이프치히와 가깝다.

Wittenberger Markt
비텐베르크 시장 광장


마르틴 루터가 인류역사에 가지는 의미는 종교개혁 이외에도 많습니다.
자본주의와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을 제공했고, 세상학문을 신학(神學)과 분리하여 본격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루터의 또다른 기여는 음악입니다.
루터는 "음악은 신학 다음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했지요.
음악은 신학과 닮은 점이 많은데 특히 영혼을 고치고 영들을 소생시키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에서 한정된 이들에 의해서만 사용되오던 찬송을 만인의 소유물로 돌려주었습니다.
예전의 그레고리안 찬트(chant)에서는 예배를 드릴때 회중은 잠잠히 있고 성가대만이 송영을 번갈아 불렀지요.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비롯하여 많은 찬송곡을 작사-작곡했습니다.
루터를 가장 존경했다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를 주제로 한 교회 칸타타(BWV 80)도 만들었지요.
아래 인터넷 주소를 클릭하여 들어보십시오.
마지막 코랄이 압권입니다.
http://www.greatjsbach.net/WorkDetail.php3?detail=BWV80

아래 제가 포즈를 취한 사진을 보면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인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의 원탑 둘레에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란 글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독일어의 발전에도 기여했지요.
독일어 성경은 루터 이전에도 있었으나,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경은 독일에서 진정한 국민의 책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독일어는 문법이나 구문에서 획기전인 발전을 했습니다.
루터가 슈팔라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성경번역 원칙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당신에게 때때로 적합한 단어를 물어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단순한 말을 가르쳐 주십시오. 궁정이나 성(城) 안에서 사용하는 말은 사절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단순성으로 유명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마르틴 루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가톨릭 일부에서는 여전히 마르틴 루터에 대한 비판이 강한 편이지요.
수녀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랬다는둥......
특히 마르틴 루터가 초기에는 유대인을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우대하다가 이들이 끝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자 유대인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섰고, 이는 훗날 유대인 탄압의 또다른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유대인들은 루터를 그리 반기지 않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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