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5일 금요일

서양 사람들에 대하여....

고백하건데, 내가 어렸을 적에는 서양 사람들의 얼굴을 서로 구별하지 못했었다.   나는 부산에 주둔하던  미군부대인 하야리야 부대 앞에서 살았었다.  아침 저녁으로 부대의 보초들의 얼굴들을 보았지만 어린 생각에 시간마다 바뀌던 보초를 서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그것은 상당한 모순이었다.  왜냐하면  그 시절에 TV에서는 '육백만불의 사나이'며 '소머즈'며 '원더우먼'등의 외화를 상당히 많이 방영을 하는 시절이었고, 나는 TV 안에 나오는 미국인들의 얼굴을 서로 구별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일상에서 매일 보는 '미군'들의 얼굴은 정말 구별하지도 못했고, 구별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었다.  구별 못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여러가지가 있을 수는 있을 것 같다.  군복이라는 유니폼은 개인간의 차이를 극소화하고, '군인'이라는 집단 아이덴티티를 극대화하므로, 어린 나는 그 사회적인 의도에 유인되어 구별 자체를 의도하지도 못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일상의 너무나도 익숙함 때문에 나와 교류가 거의 혹은 전혀없는 미주둔군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서 안했을 수도 있고... 너무나도 어릴 때의 일이라 이유가 정확히 무엇이었다라고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 본다.

이런 '서양인 구분 불감증'은 그 이후로도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영어공부를 학교에서 하라고 혹은 대학교에 갈 때 필요해서 했지, 외국인과 의사소통하기위해 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영어학습목표의 저편에 있는 외국인과의 소통과 그들로부터의 학습 혹은 그들에게 한국의 뭔가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궁극적인(?) 외국어 학습의 목표를 알게 된 것은 직장에 입사하고서도 꽤 후의 일이다.  젊어서의  시야가 그렇게 좁은 것이 아마도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그러던 내가 현재 외국에 오년째 살면서 느끼는 것은 과거의 나의 외국과 외국인에 대한 자세에서 보면 천지개벽할 관점의 변화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외국에서의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이란 어떤 존재이고, 또 한국인 2세, 3세의 문제는 또 무엇이고, 해외의 한국인 사회의 문제는 무엇이고,  한국의 위상 변화와 한국인의 성숙성 변화 필요성이란 또   어떤 문제이고, 거기에 부차적으로 해외 열심히 진출하려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며, 그 속에서 기독교 탄생과 성숙의 대륙인 유럽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무관심속의 유관심이란 또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며 등등의 개인적인 Agenda 가 생기고 있는 것도 어린시절 나의 관점에서 보면 놀랄일이다.

 외국인을 바라볼 때 견지해야할 관점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성의 존중'일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그런데 같이 공존하면서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단지 그냥 놔두는 것만은 아니고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고, 그로 인해서 상대방의 관점차이를 올바로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하고 대우해 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나라가 폐쇄된 사회이면 외국인의 다양성 인정을 고려해 볼 필요조차 없겠지만, 어쩄거나 우리는 우리 국부의 상당한 부분은 해외 수출입에 의존하고 있고, 교류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거래의 상대방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일 것이다.

 나도 고등학교때부터 현재까지도 불성실한(!) 기독교인이었는지라...  해외에 나와 있으면서도 교회를 간혹 나가려고 하고 있고, 아이나 가족이 교회에 성실하게 다니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는 입장이긴 하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참 오리무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해외선교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해외선교를 통해 교세를 확장한다는 패러다임은 아마도 한국에서 교회확장을 위해 전신자를 동원해서 포교활동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국내교회활동의 연장선에서 나온 생각일 것이다.  인도적인 명목으로 원조활동을 하는 것이야 숭고한 인류애의 발현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름하게 잡신(!)들이 판을 치는 저개발국에 원조라는 간교한 수단으로 교세를 확장하는 것은 더 이상 숭고하게 볼 수 없다.  이는 기독교의 원조인 유럽에서도 전근대적이고 비윤리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하지않고, 관련된 종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형성은 19세기에 대략 끝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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