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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아르헨티나의 technical default

아르헨티나에 최근 출장 다녀온 동료로 부터 들은 이야기. (2013년 10월)

 아르헨티나는 과거 포클랜드 해전 사건으로 영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  그 이후 유럽과의 교역량도 줄고, 인근 브라질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해 국제무역에 있어서 원만한 교역을 할 수 없었고, 그 결과수출입대금을 결재하기 위한 달러를 계속 미국으로부터의 차입에 의존하다가 급기야 2000년대 초반에 외환반출금지 및 외국 부채 지불 중단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후 해외로부터차입한 외환에 대해서 전체 금액의 10% 만을 지불하겠다고 중재안을 내었고, 채권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의 채권자 중 90% 가 이에 동의하자, 우선 미국에 분기별로 이전 차입금의 10%를 순차적으로 이체하였다.  그런데 미국내 채권자 중 동의하지 않았던 10%가 전체 동의를 얻지 못한 송금에 대한 부당성을 미국내 법원에 재판을 청구하였고, 그 결과 미국내 90%의 채권자는 절차적인 문제점 등으로 인해 10%의 채권자들에게 패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존 미국에 이체되던 대금조차도 10%의 소수 채권자들이 차압하게 되자, 더 이상 채권의 이행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아르헨티나 정부는 더이상 송금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외환거래가 거의 중단되게 된다.  공시 아르헨티나 페소-달러 환율이 1달러당 5.9 페소였지만, 실제 시장에서 거래되는 환율을 1달러당 10페소가 넘었으며, 그조차도 정부에서 허가한 소수의 지정은행 지점에서만 제한적으로 거래되었다.  외국인 관광객은 공항에서 조차 사용하다 남은 페소를 달러로 교환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의 어느 은행도 페소화를 환전해 주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아르헨티나의 주요 수출품목중 하나인 식량등 농산물 수출도 정부가 수출에 부가하는 엄청난 수출세 (40~50%)를 견디다 못해 농부들이 더 이상의 정부를 통한 수출을 중단한다는 선포를 하였고, 이후 아르헨티나 농산물의 공식적인 수출은 이루어 지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이에 따라,아르헨정부에서는 남방의 섬을 하나 지정하여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하고, 해당 섬에서 생산되는 물품은 무관세로 수출이 가능하도록 하고, 다만 아르헨티나 자국으로의 수입은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이로인해, 이 섬에서는 외자계 기업들이 공장을 설립하여 젊은 아르헨티나 인들을 고용하여 값싼 노동력과 세금의 혜택을 보면서 해외 생산기지로서 활용하도록 되었다.

2012년 7월 25일 수요일

스페인 외환위기

누군가가 나의 빚을 대신 값아 준다는 것은 빗 진 자들에게는 정말 매력적인 일 일 것이다.  스페인은 내년까지 값아야 할 약 2000억 유로의 국채가 있다.  특정 월에는 값아야 할 국채의 규모가 무척 커서, 인수시 이자가 7% 이상 올라가고 있다.  거의 국가 파산 위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중앙은행에서는 스페인 국가부도의 위기를 사전에 예방하고자 3000억 유로의 구제금융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인가?
- 스페인이 중기적으로 채무를 값아나갈 능력이 있는가이다.
- 그리고 이런 '노력없는 보상'에 의한 스페인 정부의 모럴 해저드 현상일 것이다.
- 더불어 유사한 상황의 타 국가들의 금융위기 해소 노력을 외부의 도움에 의존할 확률이 커 가는 것이다.

2012년 6월 20일 수요일

WSJ 유럽이 무너진다면 아시아의 미래는?

By ALEX FRANGOS
이번 그리스선거결과로 유럽 금융위기가 아시아로 확산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진정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요일 국채수익률이 다시 급증한 스페인 문제와 그리스정부가 9월까지 구제금융 목표치를 충족하기 위해 더욱 엄격한 긴축정책을 채택해야 함에 따라, 유럽경제 및 금융시스템이 무너진다면 아시아에서 유럽경제에 대한 노출도가 높은 어느 나라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AFP/Getty Images
An employee walks at Athens stock exchange on June 18, 2012.
2008년 금융위기 사례를 보면 글로벌경제가 휘청거릴 대면 아시아 전체가 타격을 입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각국의 글로벌무역 및 금융 노출도, 외환보유고, 튼튼한 정부재정, 금리인하를 단행할 여지가 있는 중앙은행 존재 여부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시아국가 정부는 서방국가에 비해 금리인하와 정부지출 증가를 통한 부양책을 펼칠 여력이 많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이래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 상태이며, 인도와 일본, 베트남 등 일부 국가는 다시 위기가 닥칠 경우 과거보다 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싱가포르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리처드 제람은 “레만 파산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글로벌금융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가 단기적으로는 타격을 입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스가 구제금융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유로존을 탈퇴하거나(여전히 가능한 시나리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가 유럽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구제금융을 필요로 하게 된다면, 아시아 주가와 통화가치가 떨어지는 한편 무역이 급감하고 가계 및 기업에 대한 대출이 말라붙으면서 경제가 둔화될 것이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국가인 한국과 홍콩, 일본과 타이완, 싱가포르, 태국과 말레이시아는 이러한 상황에서 큰 피해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GDP의 50%는 자동차와 스마트폰 등 수출이 차지하고 있으며, 타이완경제의 무역의존도는 70%에 이른다.
“유럽연합은 여전히 아시아의 주요 무역시장이며 단기적으로는 다른 시장으로 쉽게 대체할 수 없다”고 산제이 마두르 RBS 이코노미스트는 말한다.
국제은행의 자금지원과 투자에 의존하고 있는 국가도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국제통화기금은 2008년 금융위기 동안 외국은행의 대(對)아시아 대출이 1% 감소할 때마다 국내은행 역시 대출을 0.6% 줄임에 따라 중소기업과 수출업체의 자금난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금융허브인 홍콩과 싱가포르는 유럽은행에 대한 노출도가 높기 때문에 유럽발 위기가 몰려올 경우 대형은행의 정리해고사태로 이어질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GDP의 무려 20%에 달하는 은행차관을 유럽에서 대출받은 상태이다. 반면, 금융시스템이 폐쇄된 중국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다.
무역과 금융노출도가 높은 국가 중 일부는 경기침체를 방지할 만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다. 일례로 홍콩과 싱가포르는 경기부양에 동원할 수 있는 막대한 예비자금을 확보해 놓은 상태이다.
2008년 이래 위기대비 조치를 취해 온 국가도 있다. 글로벌위기 당시 금융부문 타격과 통화가치 50% 절하를 경험한 한국은 외환보유고를 늘렸으며 단기외채에 대한 금융부문 의존도를 줄였다. 태국은 수출이 말라붙었을 때 가계를 보호하기 위해 최저임금과 농가소득을 크게 늘렸다.
그러나 중국과 인도, 인도네시아와 같은 국가가 부양책이나 내수 덕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2008년 및 2009년과는 달리 금융위기가 다시 발생할 경우 채택할 수 있는 조치가 많지 않은 나라도 존재한다. GDP의 200% 이상인 정부부채를 안고 있으며 이미 시행되고 있는 초저금리 및 중앙은행 국채매입 프로그램 때문에 통화정책 조정여지가 많지 않은 일본은 유럽발 위기로 옌 가치가 더욱 올라가는 한편 유럽수출이 감소하면서 발생할 타격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인터랙티브 그래픽 보기]
인도 역시 2008년에 비해 취약한 상황이다. 경상적자가 높기 때문에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외국에서 더 많은 자본을 빌려와야 하지만 글로벌시장이 휘청거린다면 자본확보는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또한 정부부채 수준이 높기 때문에 부양책 시행도 어려울 전망이다. 경제성장 둔화와 인플레이션 지속 때문에 중앙은행이 금리를 대대적으로 삭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외환보유고도 2008년에 비해 적다.
한편, 경제성장 둔화와 고인플레이션(최근 일부 완화되기는 했지만)으로 고전하고 있는 베트남은 인도와는 달리 유럽수출비중(GDP의 13%)이 높기 때문에 더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2009년 대출급증으로 은행부담이 높은 상황에서 새로운 부양책 시행은 어려울 전망이다.
중국정부는 또 한번의 대대적인 부양책을 시행할 수 있는 자금을 보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더 낮으면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률을 선호하기 때문에 2008년과 같은 수준의 부양책을 채택하지는 않을 것이라 시사했다. 중국정부가 대형 부양책을 내놓지 않는다면 중국수출 의존도가 높은 호주와 말레이시아 등 이웃국가의 경제성장률도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번 그리스선거결과가 시사하듯이 유로존위기 방지가 가능할 수도 있다. 유로가 살아남고 불확실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유럽 경기침체는 끝나지 않지만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지 않는 시나리오이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계속된다면 아시아가 계속 경제성장을 이룩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아시아 각국은 유럽이 그럭저럭 유지되는 시나리오에 대비가 잘 되어 있다. 유럽 경기침체가 심화되지 않는 이상 아시아에 대한 심각한 위협은 없다.”

2012년 2월 27일 월요일

코닥의 멸망: 다섯 가지 이유

이달 초 나온 코닥의 파산 선언은 사진 역사의 영광스러운 한 장을 닫는 것이었다.
110년도 전에 자동 스냅샷 카메라를 소개하면서 코닥은 사진을 전문가들이나 할 수 있던 연금술 같은 것에서 누구라도 할 수 있는(심지어 누구나 해야하는), 인간 삶과 뗄 수 없는 것으로 탈바꿈 시켰다.
REUTERS/Stefan Wermuth
A Kodak film dispenser in a photo store in London.
사진술을 형성하는 데 코닥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는 코닥 이전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코닥 순간(Kodak moment)”이라는 것이 전무했던 것이다. *코닥 순간: 전성기 시절 코닥의 광고 카피로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인생의 소중한 순간을 의미한다.
코닥은 스튜디오 안에서 찍는 정식 초상사진 전문가들에게 국한된 것이었던 사진을 스튜디오를 벗어나 가족의 삶 속으로 파고들게 했다. 코닥이 어떻게 이런 역사를 창조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파산의 이유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기술 개발만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진찍는 관행을 확립하게 하기에 부족했다. 무엇을, 언제, 누가 찍느냐 하는 아이디어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여기서 코닥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족 행사나 휴가 같이 중요한 순간을 찍어 보존해야 하는 필요성을 확립하는 데 목적을 둔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던 것이다. ‘코닥 순간’이라고 명명한 이 컨셉은 우리의 일상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코닥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은 보통 아내/엄마였다. 이것 역시 코닥이 의도한 바였다.
20세가 전반 코닥은 현대적이고 모험심 많은 여성을 상징하는 “코닥 걸(Kodak girl)”을 광고에 등장시켰다. 하지만 당시의 규범적 기대에 부응하려면 이 여성은 현대적이고 패셔너블할 뿐 아니라 책임감 있는 아내이자 엄마여야 했다.
코닥의 광고는 이 여성들이 가족사를 꼼꼼히 기록하는 일에 얼마나 큰 의무가 있는지를 강조하며 코닥 순간을 담아냄으로써 그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코닥의 노력 덕분에 여성들은 사진 산업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코닥의 부상을 떠받친 것은 바로 이 충직한 “사커맘(soccer moms)”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 누구보다 많은 사진을 찍어, 현상하고, 공유하고, 앨범에 넣어, 거실에 전시했다.

그래서 사진업계에 디지털기술이 도래했을 때 코닥은 사실상 스스로 창조한 세계 속에 존재했던 것이다.
코닥보다 그 세계에 깊이 발을 들여놓은 기업은 없었다. 내가 약 11년전 로체스터 본사에서 경영진을 만나 하루를 보냈을 때 이 사실은 명백해졌다. 하루를 마칠 때쯤 나는 이 회사의 수명이 오래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후 나는 코닥이 근본적으로 문제있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더 큰 손해를 보고 있다고 썼으며 다시 6년 후 나는 내 예측이 현실화되는 것을 보며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다음은 코닥이 멸망하게 된 다섯가지 이유다.
1.시간에 갇히다
코닥 경영진은 주위 세계가 얼마나 많이 변하고 있는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누가, 왜, 언제 사진을 찍는가하는 이제는 한물 간 아이디어에 사로잡혀 있었다.
코닥은 사람들이 결코 인화본을 저버리는 일이 없을 거라고, 필름으로 찍은 고화질 사진의 가치를 간직할 거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 디지털사진은 필름 사진의 대체물 정도로 보았다는 뜻이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코닥의 이러한 생각이 거의 변하지 않았음을 보는 것은 흥미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코닥의 예상과는 달리 디지털 카메라는 결국 사진시장을 장악하게 되었다. 고화질의 사진을 제공하거나 누구나 쉽게 인화본을 만들 수 있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인화본을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모든 사진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의 도래와 함께 카메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카메라를 단순히 사진찍는 도구라기 보다 전자 기기로 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가 갖는 의미는 실로 엄청나다.
디지털 기기를 통해 소니 같은 신생기업이 코닥의 위력적인 ‘분배망’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는 가전제품 소매점에서 전자 기기 옆에 전시되었고, 코닥은 자사가 자신있는 분야가 아니라 소니와 다른 신생기업들이 주도하는 분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또한 코닥 브랜드는 디지털이 아니라 기존 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취급되었다.
3.다시 미래로
“디지털”은 또 다른 중요한 방식으로 코닥의 평형 상태를 교란시켰다.이제는 여성이 아닌 남성이 사진 산업의 주요 고객이 된 것이다.
카메라의 주요 사용자층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면서 여성을 상대로 성공적인 마케팅을 펼쳤던 코닥은 입지를 잃게 되었다.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해 카메라 뿐 아니라 휴대폰이나 PC를 통해서도 이미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인화본에 대한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고 말이다.
코닥으로서는 이처럼 사진 찍기와 인화본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사진 찍기를 주로 담당하게 된 남성들의 역할은 가족의 소중한 순간을 보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들이 찍는 사진 역시 업계 내부자들이 “덧없는 것”이라 부르는 순간에 치중한 것이었다.
미지의 영역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코닥은 이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기 보다 여전히 가족 모임이나 휴가지에서 여성들이 찍은 감성적인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과거의 사진 세계를 재창조하려 노력할 뿐이었다.
4.카메라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글쓰기의 주무대가 페이스북이 되었음에도 코닥의 시도는 기껏해야 미적지근한 수준이었다.

총 수익율 70%에 육박하는 수익성 높은 필름사업을 접기 꺼려하던 코닥은 수년간 소형 카메라와 디지털식으로 암호화된 필름, 포토 CD 같은 하이브리드 기술 등을 통해 필름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했다.
로체스터 본사에 발이 묶인 디지털 이미징 사업부는 언제나 필름과 디지털 사이에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듯 보였다. 하지만 로체스터에서 디지털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어느 때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대표적 사례가 디지털 이미지에서 수익을 창출하려고 한 코닥갤러리닷컴이다. 이 사이트는 단순히 아날로그 이미지의 디지털 버전으로, 디지털이 가진 잠재력은 코닥에서 한번도 제대로 꽃 핀 적이 없다.
5.과도한 노출
코닥은 자사의 한계를 깨닫지 못했고, 부활하기 위한 전략도 사실상 실효성이 없는 것이었다.
현 회장이자 CEO 안토니오 페레즈가 밝힌대로 “애플이 음악을 위해 하는 것을 코닥은 사진을 위해 하려고 한다. 즉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 이미지 서고를 정리하고 관리하게 돕는 것이다. 이상 세계에서는 미래의 소비자들이 코닥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코닥 메모리카드에 저장하고, 코닥 프린터를 통해 종이에 인쇄해, 가게 안에 설치된 디지털 부스에서 편집할 것이다.”
소비자를 코닥 세계로 집어삼키려는 시도는 언제나 비현실적이었다. 애플은 디자인과 플러그앤플레이(PnP) 기능으로 꿈을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코닥은 그럴 수 없었으며 시도하다 끝나게 된 것이다.
교훈
코닥은 자신이 주도하던 세계에서 기술적 도전에 직면했던 많은 기업들의 전철을 밟은 것이다.

먼저 이들 기업은 신기술이 스스로 소멸되길 바라며 무시하려고 한다.
그리고는 너무 비싸다, 너무 느리다, 너무 복잡하다 등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그것을 과소평가한다. 또 신기술과 옛기술 사이에 시너지를 만들려고 애쓰는 식으로 기존 기술의 수명을 어떻게든 연장하려고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신기술을 적극 수용하지 못하고 뒤쳐지게 된다.
코닥은 아날로그 이미지의 디지털 버전을 시도했던 바로 그때 실리콘밸리의 몇몇 신생기업에도 투자했어야 한다.
이 신생기업들은 코닥의 과거 유산, 브랜드에 대한 감상적 애착, 자사 제품 기반 사고방식에 발이 묶이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자본력의 20대가 이끄는 이 신생기업들은 디지털화된 사람들에 의해 경영되었을 것이다. 브랜드나 현재의 수익원에 연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디지털사업 모델의 높은 사망율에도 전혀 구애받지 않았을 것이며 사용자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에 아무 거부감을 갖지 않으며, 그 결과로 야기되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들 신생기업은 로체스터의 코닥 경영진과 달리 “사진의 세계”에 갇혀 살지 않았을 것이며, 사진과 소셜네트워킹이나 게이밍 같은 활동의 결합을 기꺼이 수용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코닥은 새로운 이용자 세대와 기업가들이 주도권을 잡도록 해야 했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갈 준비를 했어야 했다. 실제로 코닥이 한 일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코닥이 직면했던 어려움은 결코 별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유산에 대한 애착과 그 무게가 새로운 사업에 실리는 것을 피하는 것, 옛것과 새것 사이에 잘못된 시너지 창조나 기존 제품 라인의 수명 지연을 자제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 사업모델이 아닌 이용자를 중심으로 전략을 짜는 것이었다.
-카말 무니르 박사는 캠브리지대 저지경영대학원 전략 및 정책과 강사이며, 이 글은 WSJ 블로그 ‘더 소스’의 경영 시리즈 최신판이다.

2011년 12월 22일 목요일

한국과 딴판인 동유럽의 성탄절, 이유는?

볼록 카락소니(Boldog Karacsony), 베셀레 바노체(Vesele Vanoce), 부옹 바딸리(Buon Batale), 글래드 율 (Glad Yul). 하나 같이 알 수 없는 말 뿐이다. 하나같이 생소한 문장이라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말은 다르지만 그 의미는 하나다. 유럽 대륙에 있는 각 나라들의 성탄절 인사다. 블록 카락소니는 헝가리어, 베셀레 바노체는 체코어, 부옹 바딸리는 이태리어, 글래드 율은 스웨덴어다. 

Merry Christmas 라는 영어에 너무 익숙하다보니 유럽에 있는 나라들의 성탄 인사가 자못 생소하게 들린다. "즐거운 성탄절 보내세요."  라는 우리말을 듣고 유럽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극동 아시아에 위치한 한국에는 크리스마스가 있을까라고 의문을 가질 지도 모른다. 업무상 출장으로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다녀왔다. 유럽에는 이미 11월 셋째 주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남 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을 듯싶다. 빨간 옷을 입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자고 있는 동안 머리맡에 선물을 놓아두고 갈 것 같았고, 루돌프가 끄는 썰매에는 내게 줄 선물 주머니로 가득 차 있을 거 같은 환상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크리스마스가 전국적인 행사로서 우리에게 친숙하게 된 것은 1950년대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성탄절을 우리의 명절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추석, 설날과 더불어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되었다.
  
유럽에는 크리스마스 4주 전부터 마을 광장에 Christmas market 이 열린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 광장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졌다.

성인이 되어서도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낭만적인 날이어서 왠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에 있으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에 휩싸인 적인 많았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고 싶은 날이 성탄절이었다. 성탄절의 의미와 유래보다는 현란한 네온사인과 길 밖으로 퍼져나가는 캐럴 송의 선율에 더 열광했다.
 
사실 성탄절이 아기 예수가 태어난 것을 기리는 종교적인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성은 사라진 지 오래고 지금은 태국 같은 불교국가에서조차 여러 가지 행사를 벌이는 국제적인 연중행사가 되었다. 동시에 많은 회사들이 매출을 올리게 위해 '크리스마스 마케팅'에 열을 올린다. 양말 속에 선물을 넣어준다는 산타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19세기 초 미국회사가 만들어 낸 그럴듯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마음속의 동심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었다. 그래서 그런지 상업적인 것으로 변질된 성탄절이 예전과 같이 마음속으로 다가오질 않는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프라하 광장에 있는 시계탑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계단으로 올라가면 크리스마스 마켓이 한눈에 들어 온다. 프라하 광장에 설치된 간이 전망대.

시간이 지나면서 성탄절도 대륙별로 국가별로 조금씩 변형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는 풍습은 영국에서 시작이 되었고, 독일은 크리스마스 장난감으로 유명하다. 미국의 경우는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음악회 등의 축제 프로그램이 많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기독교 인구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성탄절을 기념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기독교 인구비율이 전 국민의 0.5프로 밖에 되지 않은 일본의 경우는 종교적인 색채를 찾아 볼 수 없는 성탄절이라는 것이 그 특징이다. 종교성이 전혀 없는 단순히 예쁘고 깜찍한 성탄절이라니.
 
 
크리스마스 마켓은 사람들로 붐비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수록 축제분위기는 점점 고조된다

크리스마스 4주 전에 각 도시의 광장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선다. 집에서 직접 만든 수제 치즈나 소시지 등을 가지고 나와 파는 사람도 있고, 꿀이나 끓인 와인을 파는 사람도 있다. 끓인 와인은 독일에서는 Gluehwein(글뤼바인)이라고 하고 불어권에서는 Vin Chaud(뱅쇼)라고 하며, 영어로는 Mulled Wine이라고 한다. 와인을 끓여서 먹는 것은 일본 술인 사께를 뜨끈하게 끓여서 먹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보면 된다. 단순히 와인을 끓이는 것이 아니라 생강이나 레몬 또는 계피 등 자신만의 제조법으로 여러 가지 향료를 넣어서 만들기 때문에 파는 가게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다. 추운 날 Mulle Wine을 한잔 먹게 되면 온 몸이 좍 풀리는 느낌을 받는다. 나도 이번 여행에서 몇 잔 맛을 봤는데 맛이 제각기 달라서 계속 맛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직접 집에서 만든 소시지를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지고 나와 판다

특히,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유럽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파는 음식의 종류도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동양 사람들에게도 아주 친숙하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다른 유럽과는 다르게 친근함이 느껴지는 장면도 많이 볼 수 있다. 헝가리의 시조는 동쪽 나라에서 왔다고 전해지는데, 실제로 헝가리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몽고반점이 있으며 이름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 성이 먼저 쓰이고 이름이 나중에 쓰인다. 발린트 톰이라는 헝가리 친구가 있는데 발린트가 성이고 톰이 이름이다. 

동질감이 있다고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사람들의 용모도 왠지 동양 사람들과 비슷한 것 같아서 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더구나 한국 사람들이 즐겨먹는 족발과 너무 비슷한 음식을 보니까 더 그랬다. 실제로 맛도 우리의 족발과 비슷했는데, 돼지고기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마늘이나 양파 등을 넣어 함께 끓여내는 방식이 너무도 흡사했다. 마자르족은 정말 동양에서 발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헝가리는 본래 동방에서 온 마쟈르 족이 기원이어서 그런지 친숙하게 보이는 음식이 많다

성탄절 기간에만 맛볼 수 있다는 끓인 와인. 추울 때 한 잔 마시면 속이 쫘악 풀린다

공 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물건을 공급받아 최종 소비자들에게 다시 판매하는 것이 아닌, 집에서 오랫동안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추어 광장에서 판다한다는 의미는 '재화를 판다' 라는 경제활동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마스라는 축제를 위해 특별히 만든 것을 모든 사람과 '공유한다' 는 뜻이 더 강하다. 

미국의 거대 회사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낸 똑 같은 상품을 돈을 주고 사고파는 상업적인 성탄절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모든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는 가운데 집에서 만든 수제품들은 그 정성을 아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팔려 나갈 뿐이다. 원료가 다르고 맛이 각기 다른 치즈의 종류에 놀랐지만, 다 팔리고 나면 다음 크리스마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어서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거 같았다.  
  
치즈와 소시지는 전부 가정에서 직접 만든 수제다
 
원료와 맛이 각기 다른 많은 종류의 치즈들

성탄절은 결코 화려한 날이 아니다. 오히려 화려하면 이상해질 수 있는 날이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은 귀족들이 사는 웅장한 성도 아니고, 따듯한 벽난로가 설치된 안락한 집도 아니었으며, 출산의 고통을 덜어주는 의사가 있는 곳도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마구간의 한 구석이었으며 그것도 말의 먹이를 놓는 말구유 속이었다. 가장 초라하고 천해보이는 곳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탄생일을 기념하는 날이 성탄절의 기원이다. 동유럽 사람들은 이런 성탄절의 의미를 잘 아는 것처럼 소박하게 보였다. 

대 중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시내의 광장에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족들과 나와서 음식을 사먹는 광경이 왠지 우리나라에서 크리스마스 전야만 되면 예약 없이는 들어 갈 수도 없는 고급 레스토랑의 모습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고 앉을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손님들에게 두 배 세배로 값을 더 받는 바가지 상혼이 극성인 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부모를 따라 크리스마스 마켓에 나온 두 꼬마의 모습
 
크리스마스 마켓 한 구석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회전 목마도 볼 수 있다

성탄절이 되면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선물이 백화점에서 잘 팔린다는 뉴스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비싸야 더 잘 팔리고 화려한 포장이 더 선호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길거리 간이 천막에서 밀가루 반죽으로 사람모양의 쿠키를 만드는 작은 경연대회를 보니 뭔가 휘황찬란한 규모를 자랑하는 페스티벌을 벌여야 뭔가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우리의 성탄절 모습과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자못 진지한 모습으로 길거리 체스를 두는 사람들이 표정에서 소박한 성탄절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캐럴 송이 크게 울려 퍼지고 시끌벅적한 행사가 없으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미 상업적인 성탄절에 익숙해진 우리의 현주소를 보는 거 같다. 다행스럽게 올해의 성탄절 모습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거 같아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도심에서는 사람 모양의 쿠키를 만드는 경연대회가 열렸다

크리스마스 마켓 옆에서 한가로이 길거리 체스를 두고 있는 모습

동유럽의 성탄절 풍경을 보면서 차분하고 가족적인 성탄절 모습이 그리워졌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일 년을 되돌아보고 가족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성탄절을 맞이하고 싶다. 비싼 선물이 오가지 않아도 좋은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지 않아도, 값비싼 공연을 보지 않아도 좋다. 가족과 함께하는 소박한 성탄절이면 될 거 같다. 동유럽의 성탄절 풍경을 보며,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리고 귀국행 비행기에서 얼마 남지 않은 2010년에 내가 잘한 일과 아쉬웠던 일을 되돌아보고, 내년에 꼭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카메라에 담은 그들의 소박한 성탄절 모습을 한 장씩 다시 넘겨보면서.

동유럽의 성탄절은 상업적이지 않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2011년 12월 21일 수요일

3000년 인도 카스트 무너진다

인도 경제 급성장 과정서 불가촉천민에도 기회 열려… 사회적 편견은 여전히 강해

인도 기업인 아쇼크 카데(56)씨는 어린 시절 늘 맨발로 살았다. 힌두 사원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고 마을 우물의 물을 길어 마실 수도 없었다. 학교 교실에선 다른 친구들과 나란히 앉지 못하고 한 단 아래 바닥에 앉아 공부해야 했다. 정신과 육체가 깨끗하지 못해 살갗만 닿아도 주변이 더러워진다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달릿'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은색 BMW 승용차를 타고 고향 거리를 가로질러 그가 재건 비용을 내서 세운 사원에 가서 기도한다. 기도하기 위해 나타날 때마다 마을 유력 인사들은 앞다퉈 달려와 그에게 깍듯이 인사한다.

인도의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3000년 이상 인도를 지배해온 신분 제도인 카스트가 무너지고 있다고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이 21일 보도했다. 1947년 영국에서 독립한 후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했던 인도는 1991년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하면서 급속한 경제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다.

시 장경제 전환 이전 세계 최빈곤국 중 하나였던 인도는 지난해 GDP(국내총생산) 1조6320억달러로 세계 9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구매력 기준 GDP는 4조570억달러로 미국·중국·일본에 이어 세계 4위다. 2010~2011년 글로벌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8.5%라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시장경제 전환은 달릿 계급에 기회였다. 브라만(승려)·크샤트리아(귀족) 등 상위 계급들이 전통적으로 더럽고 어려운 일을 하지 않는 반면 카스트에도 끼지 못하는 최하층 달릿은 경제 개방으로 생긴 수십만개 일자리에서 기름때를 묻히며 일할 수 있었다. 카데씨도 독일계 선박회사에서 일용 노동자로 일했다. 독일인 동료 노동자 월급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임금이었지만 그곳에서 일하며 배운 기술과 지식은 자신의 기업을 일구는 데 바탕이 됐다. 2년 뒤 원유 시추 회사를 차린 카데씨는 현재 4500명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 사장이 됐다. 그의 회사 가치는 1억달러가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 직원 상당수는 그보다 상위 계급 출신이다. 최근에는 아랍에미리트 왕족이 경영하는 두바이 석유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카데씨는 "불가촉천민의 자식이 왕자의 사업 파트너가 됐다. 이렇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했을까?"라고 했다. 카데씨를 비롯한 달릿 계급 출신 기업가 1000여명은 2005년 '달릿 기업인 협회'를 결성해 달릿 출신의 창업도 돕고 있다.

IHT는 인도의 전통 카스트가 경제발전 과정에서 급속히 무너지고 대신 자본주의적 계급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달릿 출신으로 성공한 기업가는 인구 16%에 달하는 2억명 달릿 중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뿌리깊은 사회적 편견도 여전히 강하다. 카데씨는 '아쇼크 K'라는 명함을 가지고 다닌다. 인도에서는 이름만으로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자신의 낮은 계급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2011년 10월 25일 화요일

한 청년의 분신이 전세계를 일깨웠다 - 무하마드 부아지지

23일 튀니지에서는 '아랍의 봄' 이후 첫 민주선거가 치러졌다. 23년간 독재 정치를 펴오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을 축출한 튀니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90%의 높은 투표율로 나타났다. 올 한해를 뒤흔든 중동의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었던 튀니지의 선거 소식에 국제 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운동이 중동 지역에 들불처럼 번지고,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경기 침체에 분노한 청년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지난달에는 세계 경제의 핵심이자 위기의 근원이었던 미국의 월스트리트에서도 시위가 시작돼 다시 전 세계의 동조시위로 번졌다. 전 세계의 시위대가 현 상황에 대한 분노와 근본적인 대책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이들 시위를 각각 별개로 놓고 볼 수는 없다.

미국의 작가 레베카 솔니트는 18일 미국의 정치평론사이트 '톰디스패치'에 기고한 글에서 2011년을 휩쓴 시위 열풍에 처음 방아쇠를 당겼던 튀니지의 한 청년의 죽음에 주목했다. 모하메드 부아지지라는 이름을 가진 이 청년은 대학 졸업 이후 직장을 구하지 못해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다가 경찰의 단속에 항의해 분신, 올해 초 세상을 떠났고 튀니지 국민들의 분노를 일거에 폭발시킨 계기가 됐다.

부아지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에서 솔니트는 현재 중동과 유럽, 미국, 심지어 학생들의 공교육 개혁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칠레에 이르기까지 '99%'를 대변하는 일반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으며 이를 촉발시킨 것은 결국 그의 죽음부터였다고 전했다.

솔니트는 사자(死者)가 된 부아지지에게 시위대가 무엇에 분노하고 있고 또 시위가 어떻게 퍼져나가고 있는지 전하면서 이 시위가 어떤 미래를 맞을지는 불명확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볼 수 없었던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고 위로했다.

다음은 이 글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원문 보기)

▲ 지난 1월 튀니지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 장면. ⓒAP=연합뉴스

희망을 점령하는 것에 대한 편지

격동의 2011년이 시작된 지 넷째 날에 하늘로 간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에게.

나는 당신에게 이 놀라운 1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절망의 힘에 대해, 희망의 크기에 대해, 그리고 시민사회의 연대에 대해.

당신의 삶은 짧았지만 죽음의 의미는 거대했고 '아랍의 봄'을 통해 많은 독재자들이 몰락하게 하는 촉매가 되었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미국의 몰락'을 보고 있습니다. 미국의 시민 사회가 갑자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지금 당신이 가난과 절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온몸에 불을 살랐을 때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시위가 벌어지기 정확히 9개월 전인 2010년 12월 17일은 당신이 분신을 한 날입니다. 당신이 하늘나라로 간 2주 후부터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힘없고 희망 없는 현실에 절망하며 몸에 불을 붙인 당신이지만, 하나의 작은 희망을 놓고 떠났습니다. 넉넉한 수입을 올리거나 경찰에게 공정한 대우를 받을 힘은 없었지만 당신은 저항할 힘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희망은 많은 이들의 꿈이었으며 99%의 꿈이었기 때문에 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튀니지인들이 들고 일어나 정권을 전복시켰고 이집트, 바레인, 시리아, 예멘, 리비아로 불이 옮겨 붙었습니다.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의 카다피가 없는 중동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지금 그 상상할 수 없었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3월 11일 지진과 쓰나미로 말 그대로 크게 요동쳤고, 자신들의 가치와 우선순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됐습니다. 중국 역시 흔들리고 있고, 중산층과 배고픈 이들의 불만이 얼마나 오랫동안 관리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인도의 미래는 누가 알겠습니까. 깜짝 놀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여성들에게 소소한 권리를 주기도 했습니다.

시리아 사람들은 군대가 무서워 집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10만 명 이상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정부의 긴축 정책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빼놨나요? 거기선 경제적 고통에 항의하는 엄청난 시위가 올 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움직임은 경제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에서는 거대한 시위와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2008년 경제를 망친 은행을 구제하는 문제를 두고 계속 싸우고 있고 정치인들에게 달걀을 던지고 있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전직 총리는 아마도 글로벌 금융 붕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처음으로 법적인 단죄를 받는 국가 원수가 될 것입니다. 스페인의 젊은이들은 5월 15일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이처럼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봉기에서 시위대는 어떤 정당이나 하나의 입장만을 얘기하지 않고 보다 더 나은 세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존중, 실질적인 민주주의, 희망과 가능성, 그리고 자신들의 경제적인 기반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페인에서 기업들과 1%의 이익에 자신들의 미래를 저당 잡힌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분노한 사람들'(Indignados)라고 부르며 지난 여름을 광장에서 보냈습니다. 이집트 혁명의 성지 타르히르(해방) 광장 점령 시위와 같은 '마드리드를 점령하라' 시위는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에 앞서 벌어진 것들입니다.

높은 교육비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에 분노하고 있는 칠레의 학생들은 5월부터 시위를 벌여오고 있고, 참여 인원은 15만 명 이상입니다. 콜롬비아에서도 지난주 4만 명의 학생들이 '교육 개혁'을 외치며 거리 행진을 벌였습니다. 영국에서는 8월 런던에 살고 있는 흑인 청년 마크 더간이 경찰의 발포로 숨진데 대한 항의의 뜻으로 젊은이들이 런던, 버밍햄 등의 거리로 나와 소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영국의 젊은이들은 지난 겨울학자금 인상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멕시코에서는 좌파 시인 하비에르 시실리아가 갱단에 의해 자신의 아들을 잃고 정부의 마약정책에 반대하는, 아름다운 비폭력 시위를 벌였습니다.

미국 위스콘신 주에서도 지난 겨울 시민들이 공무원들의 단체교섭권을 지키기 위해 주 의회 청사를 몇 주간 점거했었습니다. 이집트인들과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피자를 보내주기도 했어요. 우리는 그들의 연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장면을 모두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점령 운동은 월스트리트에서 다른 곳으로 번져 갔습니다. 북미 각지에서 수백 건의 점령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 월스트리트 시위 장면. ⓒAP=연합뉴스

우리가 99%다

'우리가 99%다'는 점령 운동의 구호입니다. 지난 여름 '우리가 바로 99%'라고 써 있는 전단이 배포되어 8월 9일 오후 7시 30분 뉴욕 맨해튼의 '아일랜드 기근 기념관'에서 총회(general assembly)를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9월 17일 시작된 월스트리트 시위를 논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월스트리트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일랜드 기근 기념관은 1840년대 기근으로 숨진 100만 명의 아일랜드 소작농들을 기리는 곳입니다. 당시 아일랜드는 식량 수출국이었는데 특권층들이 수익을 모두 독차지했습니다. 따라서 그 기념관은 소수 특권층의 착취, 우리의 조상들을 이민으로 내모는 힘,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을 농지와 집과 조국에서 몰아내는 힘을 상징합니다.

1840년대 아일랜드의 대기근은 식량 절대량의 부족이 아닌 분배의 문제에서 발생한 근대의 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미국은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며 천연자원이나 간호사, 의사, 대학, 교사, 주택, 식량 등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따라서 미국 역시 분배의 위기입니다. 부유한 이들은 충분히 부유합니다만, '충분하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탐욕스럽습니다. 그들은 지난 30년간 우리 나머지들의 생존과 존엄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약탈해 갔습니다. 따라서 아일랜드 기근 기념관은 월스트리트 시위를 시작하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대기근 시절 굶주림으로 죽어갔던 99%는, 그리고 금융 위기로 생계와 집을 잃은 99%는 부시 행정부와 그 정부가 만든 극단적인 민영화의 시대를 통해 떠받들어진 1%의 사람들에게 대응하기로 했습니다. 상위 1%는 지난 10년 이상의 시간 동안 미국 전체의 소득 성장의 65%를 가져갔고, 2010년에는 미국 전체 인구의 6.7%인 2050만 명이 4인 가족 당 1만1157달러(약 1268만 원) 이하의 돈으로 1년을 살았습니다.

8월 말 뉴욕에 사는 28세의 한 활동가가 '우리는 99%'라는 웹사이트를 열었고, 거기에는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안전해지고 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해 결국 자신들을 빚더미에 앉게 한 교육을 받았고 또한 성실히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처하게 된 심각한 상황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트는 부의 재분배를 약간만 개선해도 해결될 수 있는 경제 상황에 대한 악몽과도 같은 이야기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호사스런 생활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19세기 물방아 기계 작업자들처럼 목숨을 버려야 할 정도로 일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일 뿐이고, 그들이 만약 병에 걸린다고 해도 모든 게 끝장나는 상황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들은 존중을 받고 생존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은 당신의 가슴을 찢을 것입니다.

26세의 나이에 저세상으로 간 부아지지 당신에게 최근 그 사이트에 올라온 글 중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26살이다. 현재 13만4000달러(1억5229만1000원)의 빚이 있다. 14살부터 일하기 시작했고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는 풀타임으로 일했다. IT 업계에서 일하다가 지난 7월 해고됐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았다. 곧바로 새로운 일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임금은 삭감됐다. 방금 우리 아버지가 지난 주 해고됐다는 걸 알았다. 한 직장에 18년간 계셨다. 나는 강박신경증이란 병을 가지고 있는데, 치료를 받기 위해 오랜 시간 근무를 안 할 수 없다.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주택 대출금(모기지)을 갚을 수 없고, 휴가를 내면 새롭게 잡은 일자리를 잃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99%다."

'우리는 99%'라고 말하는 이중 일부는 편향된 시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젊은 IT 노동자의 편지는 매우 길어서 자신의 관점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난이 그렇게 만듭니다. 가난은 또 재능과 가능성, 교유의 목소리를 흐릿하게 하며 더 심해지면 당신을 굶주림과 비참함 속에서 사라지게 만들 것입니다. 가난은 험난했던 2011년 전 세계 사람들이 저항했던 시스템의 산물입니다. 결국 '아랍의 봄'은 경제적 저항이었습니다. 그곳의 모든 독재와 전제정치 역시 지배자와 다국적 기업 등 '1%'를 위한 이익만을 추구했습니다.

스페인 '분노하라' 시위에서는 "우리는 정치가와 은행가의 소유물이 아니라"라는 슬로건이 등장했습니다. 부아지지 당신과 같은 아름다운 젊은 세대들이 일어나 미국에 있는우리들까지 함께 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 확성기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초기 비평가들은 시위대가 실질적인 요구사항을 제안해야 하는 로비 그룹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월스트리트 시위대들이 학자금 대출 면제와 같은 정부의 지원을 요구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시위대들이 품은 거대한 꿈을 작은 틀에 담으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그들은 이 운동이 속도를 내 지도부를 선출하고 누군가를 타깃으로 비판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시민사회와 대중에 의해 촉발된 자발적 운동이고 구체적인 정책 요구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이 운동은 시위를 조직하고 진행하는데 총회라는 방식을 씁니다. 시위 참가자들은 권위자를 보려는 게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모여들고 있습니다. 큰 틀에서 민주주의의 부재 현상를 조롱하는 것보다 작은 틀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시위대들의 총회는 모든 결정이 합의에 의해 이뤄지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뉴욕 경찰이 확성기 사용을 불허했기 때문에 총회에 모인 이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논의되는 내용을 전달합니다. '인간 확성기'인 셈이죠. 많지 않은 어휘는 손짓으로 전달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방식들은 대규모 회의임에도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만듭니다.

한편으로 이 총회 방식은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당신에게 결정된 사항을 통보하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평등한 발언권을 가진 시민으로서 시민사회에 참가하는 순간 직접 민주주의를 체감하게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시위대들은 뭔가를 바라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지만 그 총회는 어떤 기술도 확성기도 없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또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문자 메시지,이메일, 그리고 <점령당한 월스트리트저널>과 같은 신문과 온라인 사이트들은 이 소식을 전 세계로 퍼트립니다.

시위 참자가들은 제한 없이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거의 우리 모두의 의견을 듣고 있습니다. 과로에 시달리며 학자금을 갚아 나갈 운명의 대학생, 돈이 없어 대학 문턱도 밟지 못한 청년, 더욱 열심히 일하지만 소득은 줄어들고 있는 노동자, 직업도 없고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도 없는 많은 이들, 은행의 농간으로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 의료보험 재정 악화로 영향 받게 될 모든 이들이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엄청난 분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희망이 있습니다. 이 시위가 4주가 넘게 지속되고 있고, 지난 15일 전 세계 1000여 개의 도시로 퍼져나갔다는 점입니다. 그 시위는 '99%'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위는 "두 번째로 조국을 위해 싸웠다. 적이 누구인지 안 게 처음이다"라는 한 전직 미 해병의 슬로건처럼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에는 기후변화 운동도 등장했습니다. 기후변화 운동을 막는 건 다른 모든 문제를 막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가로막으려는 이들은 이 운동이 기업의 이윤을 떨어트릴 것이라면서 '분기 이익이 위험한 것도 아닌데 먼 미래를 걱정하지 말자'라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십수 년 전 시애틀에서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반세계화 운동이 성공적으로 벌어진 이후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슬로건이 있었습니다. 전 이미 다른 세상이 왔다고 봤기에 이 말을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뉴욕의 월스트리트 시위대의 유튜브 동영상에서 한 노인이 "우리는 모두가 중요하게 취급받는 사회를 위해 싸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한 마디인가요! 어떤 요구가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현 경제 시스템에서 사람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AP=연합뉴스

'점령하라'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함께 점령하라(Occupy together). 뉴올리언스, 포틀랜드, 스톡턴, 보스턴, 라스크루케스, 미니애폴리스를 점령하라. 점령하라. 이 말은 선언이고 공식 견해이며, 입장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특히 남성들에게 그들의 직업은 그들의 정체성입니다. 직장을 잃었을 때, 그들은 단지 실업자가 아니라 무의미한 존재가 됩니다. 점령하라 운동은 그들에게 새로운 직업을 제공합니다. 임금을 주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일자리(job)를 잃었고, 직업(occupation)을 찾았다"라는 시위대의 재치 있는 문구도 있습니다.(*occupation은 '점령'이라는 뜻과 '직업'이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다. 편집자)

물론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하고 있다"라는 표현처럼 점령이란 단어에는 암울한 의미가 있습니다. 미국 공영라디오 <NPR> 방송조차도 주식시장의 등락이 오래전부터 '99%'의 삶의 질과 무관하지 않아왔다는 듯이 다우존스 주가 소식을 하루에 몇 번이나 보도합니다. 월스트리트는 마치 미국에 소속되지 않은 것처럼 우리를 오랫동안 점령해 왔습니다. 이제 월스트리트는 미국이 외국을 점령하듯 그 일부분이 점령당하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는 미국이 아닙니다. 아마 적국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점령당했습니다. 미국 원주민(인디언)들이 40여 년 전 샌프란시스코 만에 있는 알카트라즈 섬을 18개월 동안 점령하고 원주민 운동을 일으켰던 방식으로요. 당신이 서 있을 곳을 정하고, 그곳에 있을 때 당신은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써 또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올해 5월 오하이오에서는 로빈 후드를 자처하는 이들이 체이스은행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에 등장했습니다. 이 40명의 로빈 후드들은 또 지난주 시카고에서 열린 국영 모기지은행 회의에도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압류 위기에 처한 주택들이 점령당하고 있습니다. 압류는 물론 사람들을 집이 없는 상태로 만듭니다.

역사적인 이 순간에서 점령은 우리 모두의 일이 될 것입니다.

혁명의 시작과 미래

당신의 절망이 희망을 낳았습니다. 누구도 미래를 모릅니다. 10개월 전 분신했을 당시 당신도 확실히 알지 못했고, 현재 우리 누구도 모릅니다. '미국의 가을'은 차치하고서라도 '아랍의 봄'이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 지를요. 이 운동은 갓난아기의 상태로 세상에 도달했습니다. 그 아이의 운명, 살아남아 성장할 수 있을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 아이는 1968년 '프라하의 봄'처럼 억압될지 모릅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같이 분노에 찬 청소년기를 겪으면서 성장할지도 모릅니다. 시민사회가 전체주의로부터 나라를 해방시켰던 체코슬로바키아나 헝가리, 통일 독일에서처럼 광채를 빛내며 태어나 환영을 받다가 결국 둔감한 중산층 시민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르코스 일가의 도둑정치(kleptocracy)를 축출한 1986년 혁명 이후의 필리핀처럼 격동 속에서 성장할지 모릅니다. '1%'를 대신해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지원한 군사 쿠데타로 사라진 1953년 이란의 모하메드 모사데크 수상과 1954년 야코보 아르벤즈 과테말라 대통령, 1973년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처럼 초기에 암살당할지도 모릅니다.

인류의 아이이건 역사의 아이이건, 우리는 이 아이가 무엇이 될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아이가 누구를 닮았는지를 생각해보면 아직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무엇과 닮아 보이나요? 물론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의 동조 시위가 올해 전 세계에 걸쳐 태동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어떤 점에서는 1950년대 시민운동과도 비슷합니다.

1870년대 미국의 대공황 때 자발적인 전국적 봉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1877년 벌어진 철도 파업은 폭력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점령하라' 시위는 비폭력 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 때도 많은 극단주의 운동이 탄생했습니다. 여기엔 가족과 같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2003년 2월 15일 이라크 침공에 임박했을 때 전쟁에 반대해 7개 대륙(맞습니다, 남극 대륙을 포함해서요)에서 벌인 행진과 시위는 분명히 닮았습니다. 반 세계화 시위는 대모(代母)격입니다. 그리고 10살 더 먹은 형제도 있습니다.

9.11 테러에서 싹튼 공동체 정신

주코티 공원은 월스트리트에서 단 두 블록 떨어져 있습니다. 또 9.11 테러가 벌어진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한 블록 떨어져 있습니다. 그라운드 제로는 9.11 테러 당시 심각하게 손상을 입은 곳입니다.

올해 9월 21일 제 친구 마리나 시트린은 주코티 공원에서 제게 편지를 썼습니다.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에 있어.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부터 이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나이도 천차만별이야. 특히, 9.11 추모비를 지키는 보안 요원들 중 몇 명은 건설 노동자들처럼 점심을 먹으려 이곳에 들러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있어."

9.11 테러 이후 모든 이슬람교도들이 테러리스트고 지하드 전사이며 자살폭탄범이라는 공포에 찬 환상을 갖고 있던 서방 국가들에게 10년 뒤 '아랍의 봄'이 그러한 환상을 깨는 비폭력 혁명으로서 9.11 테러의 대척점에 섰다면, 9.11 테러 10주년을 맞은 지 6일이 지나 시작된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10년 전 그날에 대해 주목할 만한 것은 모든 이들이 차분하고 아름답게 대처했다는 점입니다. 뉴욕 시민들은 서로 도우며 쌍둥이 빌딩의 계단 수십 개를 내려와 재앙을 벗어났습니다. 또 다른 시민들은 헌혈을 위해 줄을 섰고,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으며, 당시 뉴욕에서 새롭게 생겨난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첼시 피어(뉴욕의 종합 스포츠 센터)에는 무료 급식과 의료지원, 그라운드 제로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한 장비를 제공하는 커다란 식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식당은 또 집을 잃은 이들을 위해 숙소를 찾는 것도 도와줬습니다. 공식적인 구호 활동도 아니었지만 현재 월스트리트 점령시위보다 더 자발적이었고 활동을 이끄는 주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공식 지원 기구가 세워지면서 강제로 해체되었습니다. 당시 이 활동에 동참한 이들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 민주주의 정신을 경험했고, 의미 있는 일을 찾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깊은 사회적 교감을 나눴습니다.

제가 몇 해 전 도시 재해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을 때 이처럼 예상치 못했던 사례를 계속해서 발견했습니다. 심지어 피해가 끔찍한 수준일 때에도 사람들이 도움을 주려고 모였다는 사실은 언제나 감동적이었습니다.

전 <지옥에서 세워진 천국>라는 책을 쓴 이후 계속해서 경제 위기라는 재앙이 비슷한 종류의 공동체를 만들어낼지 자문했었습니다. 2001년 아르헨티나 경제가 위기를 겪었을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뉴욕의 거리와 많은 다른 도시에서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를 점령하라' 시위에서 "이제 때가 됐다"라고 적힌 피켓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희망은 우리 안에 있다.

이 운동은 태동하기까지 3년이 지연됐습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2001년 정부가 은행 계좌를 동결시키기 전부터 있었던 경제적 불만과 디폴트 위기에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반면 미국 경제는 3년 전에 붕괴됐고, 당시에도 몇몇 분노한 이들이 있었지만 실제 반응은 미뤄졌거나 다른 방식으로 유인되었습니다.

당시 분노는 사실 우리를 위해 상황을 시정할 수 있는 대선 후보에 집중하는 강력한 풀뿌리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름다운 운동이었고, 희망에 가득 찬 운동이었습니다. 그 운동은 자신들의 후보를 백악관으로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대통령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떠나버렸습니다. 운동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 운동은 기업과 싸워 기후변화 정책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운동은 한 명의 선출 공직자가 1000만 명의 시민, 또는 시민 사회 자체와 동등하다는 듯이 스스로 해체되어 버렸습니다. 그 운동은 나이와 인종을 초월했었습니다. 저는 이 운동이 정치가와 선거에 대한 환멸을 느낀 다음 망가져 버린 제도의 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기 위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정확히 이 운동이 무엇을 닮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닯았다고 꼭 그처럼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기대하지 않았던 운동은 이제 막 한 달이 지났고 그 앞에 우리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은 당신에게 희망을 줄 것입니다.

     
/김봉규 기자(번역)

2011년 10월 7일 금요일

남성장수-사르데냐 섬 목동

입력 : 2011.10.07 03:05

[100세 이상 남녀비율 세계 평균 1대7… 이 섬에선 1대1]
사르데냐 남자들은 - 나이 들어서도 평생 목동
부인과 사별하면 곧 재혼… 하루 평균 12㎞ 이상 걸어
한국 남자들은 - 70세 넘으면 집에만 있고
아내·며느리에 의존, 독립적 생활력 거의 없어

십여년 전 장수학자들이 모여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100세 넘게 사는 '100세인'이 많으면서 이들이 비교적 건강하게 살고 있는 장수촌을 파란색 펜으로 동그라미 쳤다.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이카리아(그리스), 오키나와(일본), 니코야(코스타리카)였다. 이 중 사르데냐는 독특하다. 세계적으로 100세인은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 7배 많은데, 유독 여기선 남녀 똑같이 100세를 누리기 때문이다.

지난 4일 가천대 이길여암당뇨연구소에서 열린 '한국·이탈리아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한 장수학자들은 "사르데냐 목동처럼 살면 남성도 여성 못지않게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서쪽 지중해에 위치한 섬 사르데냐는 세계적인 장수촌이다. 특히 남성 100세인이 많기로 유명하다. 이들은 평생 해발 416m 산간 지역을 매일 오르내리며 하루 평균 12㎞씩 걷는다.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 제공
이탈리아 반도 서쪽의 지중해에 위치한 섬 사르데냐에서는 인구 160만명 가운데 250명이 100세가 넘는다. 112세까지 살아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던 안토니오 토드도 이곳 출신이다. 사르데냐에서도 섬의 중동부에 위치한 해발 416m의 산간 지역에 특히 100세인이 많다. 이 지역 남성들은 주로 양이나 염소를 치는 목동인데, 경사진 언덕길을 하루 12km씩 걸어 다닌다. 사르데냐 삿사리대학 지아니 페스(Pes) 교수는 "100세 넘어서도 양몰이를 계속한다는 것이 결정적 장수 요인"이라면서 "양치기는 농사처럼 노동 강도가 세지 않아 피로감은 적고 운동량이 충분하다"고 했다.

페스 교수는 "내가 만난 백세인들은 모두 활동적이고 사교적인데다, 사별하더라도 금세 재혼하기 때문에 혼자 사는 법이 없다"면서 "부부가 늘 서로를 돌봐주며, 가족 간 유대감도 매우 강하다"고 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스냅샷으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식단은 소일 삼아 직접 기른 농산물로 차려 소박한데, 보리로 만든 얇은 빵(디스토쿠)이 주식이다. 이 빵은 발효시킨 반죽으로 만들어 혈당을 급격히 올리는 법이 없다. 그래서 당뇨 환자가 드물다. 쇠고기·돼지고기 대신 양고기·염소 고기를 먹는다. 양젖을 마시거나, 양젖으로 만든 치즈도 많이 먹는다.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한다는 뜻이다. 여느 이탈리아인들처럼 올리브오일과 포도주를 즐기고, 특히 토마토를 많이 먹는다. 모두 항산화 성분이 많이 든 식품으로 노화를 지연시키는 효과가 있다. 토마토에는 전립선암 예방 효과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샤르데냐에서도 남성 장수인이 다소 줄고 있다고 페스 교수는 전했다. 그는 "최근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들어와 사르데냐 남성들이 목동 일을 못하는 것이 원인인 듯하다"면서 "평생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반면 한국은 100세인 가운데 유달리 여성 비율이 높다. 10년 전에는 여성 100세인이 12배나 더 많았고, 지난해 조사에서도 여전히 여성이 8배 많았다. 가천의대 박상철 교수는 "한국 남성들은 나이 들면 대접받으려 하고, 70세만 넘어도 활동을 접고 집안에만 머문다"면서 "여성들이 끊임없이 가사를 계속하는 것과 대조적"이라고 말했다. 한국 남성들이 의식주를 주로 아내나 며느리에게 의존하고 독립적인 생활력이 없는 것도 남성 100세인이 드문 이유로 꼽혔다. 한국에서도 남성 100세인은 주로 강원도 산간지역에 살면서 쉼 없이 움직이고, 돈 관리도 직접 하는 자립심 강한 스타일이라고 박 교수는 전했다.

박 교수는 그러나 "2005년 2.7%에불과하던 중졸 이상 100세인이 2010년 5.8%로 두 배 이상 늘면서, 남성 100세인도 늘고 있다"면서 "사회경제적 수준이 높은 고학력 남성들은 자기 관리를 잘하고 나이 들어서도 사회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고학력 남성 100세인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2011년 2월 14일 월요일

매력 잃어가는 유럽 다문화 주의


European Pressphoto Agency
Riot police contain a march by members of the English Defence League, who were demonstrating against radical Islam in Luton, north of London, on Saturday.
런던 – 런던의 버려진 공업 단지 내 이슬람 사원을 축출하려는 지방 의회의 노력이 다문화주의를 용인했던 영국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영국 총리는 다문화주의가 거부되어야만 한다고 줄곧 주장해왔다.
지난 토요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총리의 발언은 수십년간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민이, 자국내 테러에 대한 공포와 지역 문화의 붕괴를 초래한 이후, 최근 몇 년간 다수의 유럽국가들이 이를 억제하기 위해 취한 일련의 움직임 중 가장 최근 조치이다.
새로운 방향성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 유럽 국가들은 외국인 혐오 정서를 부추기거나 혹은 터키와 같이 유럽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국가의 국민들에게 소외감을 안겨 줄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고민하고 있다. 또한 개발도상국들에서 유입되는 숙련된 노동자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고 있다.
지난 주 독일에서 있었던 테러리즘에 관한 연설에서, 캐머런 총리는 극단적 이슬람주의자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자유주의”를 요구하며, 왜 영국이 이들을 관용하고, 서방의 가치를 따르지 않는 단체에 재정지원을 해야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일례로 캐머런 총리는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고, 고립주의를 전도하는 단체들에 대해 언급했다.
런던 동부에서 일어난 언쟁이 바로 그 증거이다. 이번주에 열린 공청회에서 지역 운동가들은 타블리기 자맛 이슬람 단체의 영토 사용권 재허가는 철회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지역 운동가들은 이 단체가 여성이 예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또한 이들의 교리가 테러리스트를 고무시키고, 대중사회로부터 고립될 것을 설교한다는 혐의를 제기했다.
지역 단체인 뉴함 컨썬의 대표 알란 크레이그는 “타블리기 자맛은 이 지역의 통합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사실 그들은 통합의 반대만을 가르친다”고 말했다.
이슬람 사원의 관계자는 이슬람 사원은 “이슬람 공동체로 들어오는 사람을 환영”하며, “어떤 형태로도 테러리즘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슬람 교도인 타히르 사이예드씨는, 화려하게 장식된 지역 타운 홀의 빅토리안 토론실 밖에서서, 이러한 충돌과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이슬람교가 점점 인기를 얻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캐머런 총리를 비롯한 유럽 정치인들은 지난 몇년간 다문화주의에 대해 반대론을 펴왔다. 다문화주의란 한 사회 속의 각기 다른 그룹들이 각자의 문화적 정체성을 따를 수 있도록 장려해야한다는 개념이다.
다문화주의를 비판하는 유럽의 비평가들은 이주민 통합의 실패가 결국 유럽 안팍에 그 지역의 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며 기본 기술도 부족하고, 복지 시스템에 방해물이 되는 세대를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말한다. 스페인과 프랑스 등의 유럽 국가 내 실업율 증가가 이러한 논쟁을 더욱 격화시켜왔다.
지난 10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수상은 독일의 다문화주의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2009년 11월에는 스위스 유권자들이 이슬람 사원에 새로운 첨탑 건설을 금지하는 조항을 승인했다. 또한 작년 9월 프랑스에서는 이슬람 여성들이 전통복장인 부르카를 비롯해 온몸을 가리는 가운을 입는 것을 금지시켰다.
같은 달 수십년 간 다문화주의의 등불이라 자처했던 스웨덴에서도, 반이주정책과 반다문화주의 캠페인을 벌인 민주당이 총선에서 5.7%의 득표율을 얻기도 했다.
스웨덴 민주당의 초선 의원 중 한명인 켄트 에커로쓰 의원은 “스웨덴 사람들이 일부 도시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곳이 고향이라고 느끼지 않으며, 그 곳은 더이상 스웨덴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다문화주의 대신에, 유럽 전체에 걸쳐 정치인들은 최근 이민자들이 완전히 정착할 수 있도록 의무적인 언어 과정 등의 정책을 통해 통합을 이룰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영국 북서부 지방에 위치한 번리지역에 거주하는 아푸 챠우더리씨는 도서관과 법원, 정부 기관의 문서들에 점점 번역이 사라지는 등, 이미 다문화주의를 억제하는 노력들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1년 노스 웨스트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인종 폭동 이후, 노동국은 통합의 분위기를 향상시키고 새로 이주한 사람들이 우선적인 대우를 받을까 우려하는 장기 거주자들의 걱정을 완화하기 위한 일련의 변화된 조치를 시행했다. 정부는 미국의 기념식을 본따 시민권 축하행사를 시작했다. 그 행사에서 새로운 영국 시민은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2009년에는 의회에 현 주민들에게 국가에서 제공하는 집을 우선적으로 부여할 수 있는 있는 재량권을 주었다.
최근 몇년간 프랑스는 이민자와 프랑스에 체류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의무적인 언어 교육 과정을 마련해왔다. 이 과정은 여성의 권리와 프랑스의 역사적인 개요 등 “프랑스의 가치관”에 중점을 두고 있다. 과정의 말미에 참가자들은 프랑스의 가치관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으며, 그들의 가치관을 따르겠다는 서명을 해야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이같은 조치를 신중히 취해야 할 필요성도 인지하고 있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국가 정체성 이슈에 대해 캠페인을 벌였던 니콜라스 사르코지는 이민-국가정체성부를 출범시켰고, 프랑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련의 공공 토론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외국인 혐오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사르코지 대통령은 토론회를 중단 시켰고, 부처 이름에서 “국가정체성”이란 단어를 삭제했다.
타히르 사이예드씨는 다문화주의를 향한 캐머런 총리의 공격이 비교적 관용적인 유럽 국가들의 이슬람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다수의 이슬람교도들은 자신들이 사회에 통합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최근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이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이슬람교도의 77%는 자신이 “매우 강력하게” 영국에 동질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상대적으로 비 이슬람교도들은 50%만이 그렇게 생각했다. 또한 독일 이슬람 교도의 40%는 독일에 동질감을 가지고 있던 반면 독일 일반 시민의 경우 32%만이 그와 같은 동질감을 나타냈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발은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1987년에 EU에 가입 신청 했었으며, 영국이 세속적인 이슬람 국가로 EU 가입을 지지하는 터키에서는 유럽의 정치인들이 터키의 EU가입에 반대하며 발표한 성명이 전국적인 관심을 얻고 있다.
각국 성명에 대해 이스탄불 아날리스틱의 정치 분석가 아틸라 예실라다는 “EU가 과연 회원자격에 진실된 태도를 보여왔는지에 대해 점점 의문이 커진다”고 말했다.

2011년 2월 11일 금요일

불경기 한파…공짜로 땅을 주는 곳도 있네

인구 유입·경제 활성화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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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공짜로 땅을 주는 마을이 화제다. 불경기 한파로 시골 지역의 인구가 급감하면서 소규모 도시나 마을들은 인구 증가와 일자리 창출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이주민이나 기업에 공짜로 땅을 주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 지난해 말부터 공짜 땅을 제공하고 있는 소도시 7곳을 알아봤다.

◆ 마른(아이오와)

아이오와주 서남부 지역에 있는 마른에는 149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른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던 때는 지난 1875년으로 당시 617명이 살았다.

하지만 지난 1960~70년대 사이 젊은층 인구가 빠르게 이 도시를 떠나면서 인구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이에 마른 주택개발사는 이 지역의 인구 유입을 위해 무상으로 땅을 제공하고 있다.

신청자는 자신이 원하는 집의 설계 도면을 제출해 허가를 받으면 땅을 부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다. 하지만 트레일러 홈이나 말이나 가축을 키울 수는 없다.

◆ 뉴리치랜드(미네소타)

미네소타주 남부에 있는 뉴리치랜드는 인구 1200명의 소도시다. 이 지역에서도 무상으로 땅을 제공받아 집을 지을 수 있다.

단 허가를 받고 1년 내에 주택을 완공해야 한다. 그러나 도로나 커브 상하수도 등에 대한 2만5000달러 정도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 윌슨등 10여곳(캔자스)

캔자스주도 인구 유입을 위해 무상으로 땅을 제공하고 있다. 캔자스주의 일부 소도시들은 지난 1900년 이래 지속적으로 인구가 감소하며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캔자스 주 정부는 무상으로 땅을 제공하며 이주민 모시기에 팔을 걷어 붙이고 있다. 캔자스 프리 랜드 지역은 윌슨 허든 지역 등 10여 곳이 넘는다.

◆ 베아트리스 커티스(네브래스카)

네브라스카주주 베아트리스는 지난해 먼저 오는 주민에게 무상으로 땅을 제공하는 새로운 이주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땅을 제공받은 사람은 5년 동안 살아야만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네브라스카주에서 베아트리스 지역이 가장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커티스 지역은 3.266스퀘어 킬로미터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832명에 불과하다. 이 지역은 공항이나 내브래스카 농업기술대학과 불과 수 분 거리에 떨어져있다. 커티스 지역에 있는 한 기업은 지역 경기 활성화를 위해 유틸리티가 포함된 싱글 패밀리 홈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일부가 남아있는 상태다.

◆ 머스키건(미시건)

미시건주 머스키건 지역에서 25명 이상의 풀타임 종업원을 고용하거나 산업용 빌딩을 제공하는 기업에게 무상으로 땅을 제공한다.

25명 이상 고용한 기업에게는 5에이커의 땅을 50명 이상일 경우 12에이커 75명 이상 고용하면 20에이커의 땅이 무상으로 제공된다. 또한 25명 이상을 고용하면 물과 하수처리 비용 50%를 절감해준다.

◆ 캠든(메인)

메인주 해변 지역에 있는 캠든에서는 최소 24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에게 3.5에이커 규모의 땅을 제공한다. 지역 주민들은 이 지역에 관광이나 바이오테크 파이낸셜 서비스 그린 비즈니스와 관련된 기업을 유치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역 경제 활성화와 친환경 산업 육성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공짜 땅 외에도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