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양한 팀을 한데 묶어 전략으로 구체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지난 18일 사임한 일본판유리의 최고경영자(CEO) 크레이그 네일러가 회사를 떠나면서 밝힌 사임의 변이다. 한 기업의 수장으로서 하고 싶은 일을 다 못하고 떠나는데 대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네일러 대표가 사임하면서 일본 기업 속의 외국인 CEO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일본의 보수적인 기업문화와 비교적 자유로운 풍토에서 경영하기를 원하는 서구 경영자간의 마찰이 적지 않았던 것 아니냐는 물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마침 최근 7개월새 일본에서는 네일러 대표 말고도 세 명의 외국인 CEO가 줄줄이 짐을 쌌다. 지난해 10월 올림푸스의 마이클 우드포드 사장이 물러났고, 올 1월에는 노무라홀딩스의 제스 바탈 영업총괄 CEO가 사임했다. 7년간 소니를 이끌던 하워드 스트링거 회장도 이달초 경영권을 넘겼다.
◆ “급진적…소통안돼” vs “변화꺼려…보수적” 충돌
일본판유리 이사회는 네일러 대표의 사임에 대해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사회에서 추구하는 회사 전략과 그의 경영 방침이 기본적으로 달랐고, 소통이 안돼 이를 조정하지 못했다는 것.
이사회는 성명서에서 "그가 회사를 맡은 이후 줄곧 악화되기만 했다"라며 "빠른 시일내에 성과를 내기 위해 회사를 너무 흔들어 댔다"고 비판했다. 회사는 비즈니스의 우선순위를 놓고 무엇보다 충돌이 자주 빚어졌다고 지적했다.
회사측은 실적부진의 원인이 이같은 결과의 산물이라고 진단했다. 일본판유리는 회계기준 2010년 150억엔의 순이익을 올렸지만 지난해에는 20억엔의 손실을 봤다. 네일러 대표는 이 와중에 전체직원의 12%를 감원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실적부진과 소통부재는 다른 CEO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다. 소니의 스트링거 전 회장은 게임과 엔터테인먼트 등 사업 다변화에는 성공했지만 전통 주력사업인 TV부문을 살리진 못했다. 올림푸스의 우드포드 사장 역시 경영진과 충돌을 빚고 내부고발 사태를 일으키다가 6개월만에 물러났고, 제스 바탈 역시 노무라를 전 직장인 리먼처럼 글로벌 투자은행으로 만들지 못했다.
일본 기업들은 외국인 CEO와 소통이 안됐다고 토로하고 있지만 외국인 CEO들은 정작 변화에 소극적인 일본의 기업문화를 지적하고 있다. 이로 인해 결정이 늦어지고 시간만 지체됐다는 것이다.
소니 스트링거 회장은 CNN과 가진 인터뷰에서 "대지진 직후 경기침체의 우려가 있으니 비상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라며 "하지만 나를 포함한 일부만 급박하게 움직였을 뿐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고 털어 놓았다.
◆ 글로벌화 한다던 日 기업…이중적 태도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일본기업들의 이중적인 문화 때문에 외국인 CEO들이 적응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글로벌화를 추진한다고 하면서 고유의 문화를 버리려 하지 않다보니 충돌이 빚어졌다는 것.
리먼브러더스의 아시아·태평양지역 CEO 출신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노무라에 참여했던 제스 바탈 역시 공격적인 영업을 꺼려했던 일본문화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는 리먼 재직 당시 고수익채권 투자로 명성을 날리던 인물. 2002년 리먼 아·태지역 총괄 CEO를 맡은 뒤 5년만에 채권부문 매출을 5배나 늘려놓은 경험이 있었지만 그의 경험은 노무라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비주력 사업의 구조조정을 주장했던 바탈과 전분야에 걸쳐 고른 포트폴리오를 구성하자는 본사와의 마찰은 결국 그의 사임으로 끝을 맺었다. 명목은 그의 투자가 손실을 냈다는 것이었지만 그의 글로벌 확장 전략에 반기를 든 일본 경영진들이 그를 밀어낸 것이라고 소식통은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노무라의 내부 갈등은 결국 노무라의 글로벌화 전략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진단했다.
올림푸스도 비슷한 경우다. 우드포드 전 사장은 회사가 17억달러에 달하는 분식회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부고발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되돌아온 것은 해고 통보였다.
우드포드는 "내가 뭘 잘못했는 지 알 수가 없다"라며 "회장은 분명 나에게 회사를 변화시켜 달라고 부탁했었다"라고 말했다.
아시아소사이어티의 알렉산더 하니 연구원은 "외국인이 일본기업체에 취업하기란 여전히 어렵다"라며 "많은 일본기업들이 세계화 돼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일본 기업은 자신들의 왕국을 공개하길 꺼려한다"고 설명했다.
글로벌화를 추진한다고 하면서 자국어를 고집하고, 유능한 인재를 가리지 않고 뽑겠다고 하고선 많은 월급을 줄 수 없다고 하는 것도 일본기업들이 보여주는 이중적 태도의 대표적인 사례다.
◆ 성공사례도 있어…시행착오 거쳐야
그렇다고 일본에 발을 디딘 CEO가 모두 실패만 한 건 아니다. 카를로스 곤 닛산자동차 CEO처럼 성공스토리도 얼마든지 있다. 곤은 1999년 닛산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거쳐 2001년 닛산의 CEO가 됐다.
강력한 구조조정과 개혁조치로 닛산의 악성부채를 말끔히 해소했으며 적자 기업 닛산을 흑자기업으로 탈바꿈 시켰다. 2004년 외국인 CEO로는 처음으로 일본정부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남수포장 훈장을 받았다. 2005년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일각에서는 일본기업과 외국인 CEO간의 불협화음을 시행착오로 보기도 한다. 30여년전 IBM이나 프록터앤갬블(P&G) 같은 회사가 내수시장에서 벗어나 세계시장으로 눈을 돌리던 시기에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일본 임원훈련연구소의 니콜라스 베네스 이사는 "일본 기업들 역시 P&G나 IBM이 그랬던 것처럼 다소 힘든 시기가 필요하다"라며 "결국엔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 스스로 해외 시장 진출에 대한 의지가 강해 외국인 CEO에 대한 수요가 여전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일본은 인구가 줄어들고 내수시장은 갈수록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는 만큼 신흥시장을 중심으로 해외를 이해할 수 있는 인재가 계속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로이터의 칼럼기고가인 웨인 아놀드는 "일본 기업이 지금보다 국제화를 서두르기 위해선 더 많은 외국인 CEO를 영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손희동 기자 sonny@chosun.com
지난 18일 사임한 일본판유리의 최고경영자(CEO) 크레이그 네일러가 회사를 떠나면서 밝힌 사임의 변이다. 한 기업의 수장으로서 하고 싶은 일을 다 못하고 떠나는데 대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네일러 대표가 사임하면서 일본 기업 속의 외국인 CEO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일본의 보수적인 기업문화와 비교적 자유로운 풍토에서 경영하기를 원하는 서구 경영자간의 마찰이 적지 않았던 것 아니냐는 물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마침 최근 7개월새 일본에서는 네일러 대표 말고도 세 명의 외국인 CEO가 줄줄이 짐을 쌌다. 지난해 10월 올림푸스의 마이클 우드포드 사장이 물러났고, 올 1월에는 노무라홀딩스의 제스 바탈 영업총괄 CEO가 사임했다. 7년간 소니를 이끌던 하워드 스트링거 회장도 이달초 경영권을 넘겼다.
◆ “급진적…소통안돼” vs “변화꺼려…보수적” 충돌
일본판유리 이사회는 네일러 대표의 사임에 대해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사회에서 추구하는 회사 전략과 그의 경영 방침이 기본적으로 달랐고, 소통이 안돼 이를 조정하지 못했다는 것.
이사회는 성명서에서 "그가 회사를 맡은 이후 줄곧 악화되기만 했다"라며 "빠른 시일내에 성과를 내기 위해 회사를 너무 흔들어 댔다"고 비판했다. 회사는 비즈니스의 우선순위를 놓고 무엇보다 충돌이 자주 빚어졌다고 지적했다.
회사측은 실적부진의 원인이 이같은 결과의 산물이라고 진단했다. 일본판유리는 회계기준 2010년 150억엔의 순이익을 올렸지만 지난해에는 20억엔의 손실을 봤다. 네일러 대표는 이 와중에 전체직원의 12%를 감원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실적부진과 소통부재는 다른 CEO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다. 소니의 스트링거 전 회장은 게임과 엔터테인먼트 등 사업 다변화에는 성공했지만 전통 주력사업인 TV부문을 살리진 못했다. 올림푸스의 우드포드 사장 역시 경영진과 충돌을 빚고 내부고발 사태를 일으키다가 6개월만에 물러났고, 제스 바탈 역시 노무라를 전 직장인 리먼처럼 글로벌 투자은행으로 만들지 못했다.
일본 기업들은 외국인 CEO와 소통이 안됐다고 토로하고 있지만 외국인 CEO들은 정작 변화에 소극적인 일본의 기업문화를 지적하고 있다. 이로 인해 결정이 늦어지고 시간만 지체됐다는 것이다.
소니 스트링거 회장은 CNN과 가진 인터뷰에서 "대지진 직후 경기침체의 우려가 있으니 비상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라며 "하지만 나를 포함한 일부만 급박하게 움직였을 뿐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고 털어 놓았다.
- ▲ 일러스트=조경표
리먼브러더스의 아시아·태평양지역 CEO 출신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노무라에 참여했던 제스 바탈 역시 공격적인 영업을 꺼려했던 일본문화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는 리먼 재직 당시 고수익채권 투자로 명성을 날리던 인물. 2002년 리먼 아·태지역 총괄 CEO를 맡은 뒤 5년만에 채권부문 매출을 5배나 늘려놓은 경험이 있었지만 그의 경험은 노무라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비주력 사업의 구조조정을 주장했던 바탈과 전분야에 걸쳐 고른 포트폴리오를 구성하자는 본사와의 마찰은 결국 그의 사임으로 끝을 맺었다. 명목은 그의 투자가 손실을 냈다는 것이었지만 그의 글로벌 확장 전략에 반기를 든 일본 경영진들이 그를 밀어낸 것이라고 소식통은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노무라의 내부 갈등은 결국 노무라의 글로벌화 전략에 한계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진단했다.
올림푸스도 비슷한 경우다. 우드포드 전 사장은 회사가 17억달러에 달하는 분식회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부고발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되돌아온 것은 해고 통보였다.
우드포드는 "내가 뭘 잘못했는 지 알 수가 없다"라며 "회장은 분명 나에게 회사를 변화시켜 달라고 부탁했었다"라고 말했다.
아시아소사이어티의 알렉산더 하니 연구원은 "외국인이 일본기업체에 취업하기란 여전히 어렵다"라며 "많은 일본기업들이 세계화 돼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일본 기업은 자신들의 왕국을 공개하길 꺼려한다"고 설명했다.
글로벌화를 추진한다고 하면서 자국어를 고집하고, 유능한 인재를 가리지 않고 뽑겠다고 하고선 많은 월급을 줄 수 없다고 하는 것도 일본기업들이 보여주는 이중적 태도의 대표적인 사례다.
◆ 성공사례도 있어…시행착오 거쳐야
그렇다고 일본에 발을 디딘 CEO가 모두 실패만 한 건 아니다. 카를로스 곤 닛산자동차 CEO처럼 성공스토리도 얼마든지 있다. 곤은 1999년 닛산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거쳐 2001년 닛산의 CEO가 됐다.
강력한 구조조정과 개혁조치로 닛산의 악성부채를 말끔히 해소했으며 적자 기업 닛산을 흑자기업으로 탈바꿈 시켰다. 2004년 외국인 CEO로는 처음으로 일본정부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남수포장 훈장을 받았다. 2005년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일각에서는 일본기업과 외국인 CEO간의 불협화음을 시행착오로 보기도 한다. 30여년전 IBM이나 프록터앤갬블(P&G) 같은 회사가 내수시장에서 벗어나 세계시장으로 눈을 돌리던 시기에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일본 임원훈련연구소의 니콜라스 베네스 이사는 "일본 기업들 역시 P&G나 IBM이 그랬던 것처럼 다소 힘든 시기가 필요하다"라며 "결국엔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 스스로 해외 시장 진출에 대한 의지가 강해 외국인 CEO에 대한 수요가 여전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일본은 인구가 줄어들고 내수시장은 갈수록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는 만큼 신흥시장을 중심으로 해외를 이해할 수 있는 인재가 계속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로이터의 칼럼기고가인 웨인 아놀드는 "일본 기업이 지금보다 국제화를 서두르기 위해선 더 많은 외국인 CEO를 영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손희동 기자 sonny@chosun.com